광개토비 신묘년 기사에 대한 명쾌한 설명
광개토비 신묘년 기사에 대한 명쾌한 설명
서기 391년에 나이 18살에 왕이 된 고구려의 소년 왕, 그의 이름은 '안' 또는 '담덕'이라 불립니다.
죽은 뒤의 시호는 '광개토태왕'이다.
즉위한 후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기 392년 음력 겨울 11월. 그는 심각한 소식에 직면해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를 '백잔'. 즉 100개의 패배해버린 패잔 잔챙이들이라 불렀습니다.
고구려는 백제를 고구려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나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백제는 본래 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에 걸쳐 있던 '마한' 연맹체의 속국이었고 그 '마한'은 경상북도의 이웃 나라인 '진한' 연맹체와 함께
과거 중국의 식민지 낙랑,대방에 속한 나라였습니다.
중국의 식민지 낙랑,대방과 낙랑,대방의 중국계 호족들은 고구려 동천왕~미천왕 때에 고구려를 따르는 든든한 후원 세력이 되었습니다.
고구려 왕실은 낙랑,대방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백제,신라는 마땅히 자기들에게 소속되어야할 속국으로 간주했습니다.
백제,신라 그들의 의사와는 관련없이 고구려는 그렇게 간주하고 있던 겁니다.
백잔의 왕 '진사'는 결코 고구려에 굴복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사는 고구려보다도 나라 내부의 진씨(眞氏) 가문을 적폐 세력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확실하게 제압해서 백제 왕실에 복종시켜야 앞으로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진사의 정치적 라이벌 '아신'. '아신'은 진사의 조카인데. 본래 아신이 왕이 되어야 했지만 아신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진사가 왕이 되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편을 보면 아신왕이 태어날 때 매우 신비한 기적이 일어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신의 출생에 뭔가 숨기고 싶은
무언가 출생의 비밀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본다면 아신은 백제 왕실과 왜국 왕실 사이에 태어난 혼혈일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왕이 된 사례는 동양사에서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신이 왕이 되지 못한건 어쩌면 아신이 왜국 태생일 수도 있는겁니다.
그리고 진사가 왕이 된 후 어쩌면 아신은 왜국으로 가서 왜국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서기 392년 음력 겨울 10월. 고구려의 소년 정복자 광개토는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강물로 둘러싸인 백제의 천혜의 요새 '관미성'을 포위하고 일곱 개 길로 나누어
쉼없이 쳐서 20일만에 함락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때 백제 진사왕은 지원군을 보내기는 커녕 '구원'이란 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편은 서기 392년 음력 겨울 10월 쯤. 진사왕이 '구원'으로 사냥을 나갔다고 적고 있습니다.
당시 동양 세계에서 사냥은 왕이 귀족 자제들과 귀족 자제들이 거느린 노비들을 데리고 하는 군사 훈련으로 귀족들의 사병들이 왕을 따르게 하고
동시에 국왕 친위 세력을 군사 훈련으로 단련시키는 것으로서 왕권의 힘을 강화시킴은 물론 유사시에 급하게 군사를 동원시켜 언제든지
바로 출동할 수 있는 아주 초고급 군사 훈련이었습니다.
진사왕은 결코 한가하게 사냥이나 하며 놀고 있던게 아닙니다.
이 사냥은 단순한 레크리에이션이 아니라,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백제의 해상 요새인 관미성을 고구려로부터 되찾기 위한 반격의 준비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사왕이 사냥 중 실종됩니다. 그리고 10일 간 행방불명이다가 '구원'의 행궁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기록이 너무 짧아서 진사왕이 죽은 원인을 확실하게 알 수 없는데.
다행히도 야마토 정권의 역사 기록 '일본서기'에는 속시원하게 진사왕이 적은 이유가 드러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의 진사왕이 귀한 나라 '야마토'를 상대로 무례한 행동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처벌로 야마토의 네 명의 장군이 백제로 보내져 진사왕을 꾸짖자, 백제의 나라 사람들이 진사왕을 죽이고 사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야마토의 네 명의 장군은 진사의 조카 아신을 백제의 왕에 즉위시킨 후 귀환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사왕을 암살한건 왜군이고, 그 왜군을 끌어들인건 진사의 조카 아신이며
진사왕의 암살이 성공하도록 백제의 나라 사람들 즉 백제의 지배층이 아주 깊숙히 개입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 말기, 조선의 여왕 민비가 친(親)러시아, 반일(反日) 정책을 벌이자 이에 분노한 일본이 민비의 철천지 원수인 흥선대원군과 개화파 낭인들을
길잡이로 삼아서 일본군이 직접 민비를 암살했는데요. 그 사건을 '을미사변'이라 부릅니다.
진사왕의 암살은 마치 고대 시대 버전의 을미사변을 보는듯 합니다.
일본서기는 진사왕이 죽은 이유를 "귀한 나라 야마토에 무례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야마토가 백제에게 '귀(貴)'한 나라였다...... 이는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있는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 대해 한국의 역사학계는 분노하며 이것은 서기 8세기 일본 천황가가 황국 사관적 관점으로 적은 기록이므로
걸러들어야한다고 합니다. 즉 야마토가 백제보다 상국일 수는 없다는겁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광개토태왕의 정복과 그 정복의 명분을 적은 비석 '광개토호태왕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고있습니다.
"백잔,신라는 본래 고구려의 속민(屬民)이다. 그런데 신묘년 이후로 왜(倭)가 바다를 건너 백잔,ㅁㅁ,신라를 격파해 신민(臣民)으로 만들었다.
(이에 태왕이 분노하여) 서기 396년 병신년에 백잔을 정벌하여 백잔의 수도권 58개 성을 싸그리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백잔의 임금 아신이 수도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며 "태왕 폐하의 노객이 되겠습니다"고 하니 아신의 죄를 용서하였다."
여기서 신묘년은 서기 391년으로 광개토가 왕에 즉위한 해입니다.
그런데 서기 391년 이후 얼마 안된 시점에 왜군이 바다를 건너 백잔,ㅁㅁ,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죠.
먼저 ㅁㅁ은 뭔지 모르겠지만, "백잔이 격파 당했다"는건 진사의 조카인 아신이 왜군을 끌어들여 진사를 암살한 사건과 관련있는거 같습니다.
신라를 격파했다는건 비슷한 시기에 신라가 격파당해 왜국의 신민이 되거나 왜국에게 복종하게된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그런 내용이 없다 해도 크게 이상하진 않습니다. 자국에게 불리한 기록을 지우거나 안 적거나 애매모호한 수수께끼같은 괴상하고
신비한 사건을 적어서 숨겨버리는건 삼국사기에서 종종 보이는 필법이니까요.
광개토 정권은 진사왕의 암살과 그에 연이어 ㅁㅁ과 신라란 나라가 왜군에게 격파당해 복종한 사건을
"백잔,ㅁㅁ,신라가 왜국에게 격파당해 신민이 되었다."라고 보고 이를 복수하기위해 대대적 남침을 단행합니다.
그리고 첫 대상은 바로 백제였습니다.
그런데 ...,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백잔,신라가 본래 고구려의 속민이라는건 고구려측의 정치적 관점이니 그건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왜(倭)가 바다를 건너 백잔,ㅁㅁ,신라를 격파해 신민(臣民)으로 만들었다?
당시 일본열도가 조선반도의 중부,남부를 상대로 그럴 수 있을만한 군사적 힘이 있을까요?
당시 일본열도는 야마토란 연맹체가 다스렸습니다.
삼국지 동이전 왜국편에 따르면 야마토 연맹은 회원국이 무려 30여개이고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서는
바다 건너 김해,부산의 '구야한국' 즉 금관가야도 이 연맹에 가입해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마토 연맹의 연맹장은 '야마토'이며 야마토는 오늘날 일본의 '오사카 키나이 카와치'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고고학적으로 서기 3세기 중반부터 오사카를 중심으로 일본열도 대부분을 '열쇠구멍 모양 무덤'이라는 아주 큰 무덤들이
쫘라락 분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일 큰 무덤들은 오사카에 집중되어있습니다.
서기 3세기 중반부터 야마토 연맹은 황해도에 있던 중국의 식민지 대방군. 그리고 경기도 전라도 충청도의 마한 연맹.
그리고 경상남도의 변한 연맹의 연맹장 구야한국(금관가야). 이 세 세력들과의 공조를 통해
대륙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이 문물을 열도의 회원국들의 족장들에게 골고루 뿌려서 족장들의 충성을 받아냈습니다.
이를 고고학계에서는 '위세품 교역'이라고 하는데요.
그 시절에는 위세품 교역을 주도하는 나라가 그 일대의 패권을 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조공과 책봉' 외교입니다.
야마토 연맹의 왕들은 놀랍게도 여자였는데요. 삼국지 동이전 왜국편에 따르면 이 여왕들은 귀신의 도에 능했고
귀신을 아주 잘 부려서 열도의 30여개 국 족장들이 두려워하며 여왕을 따랐다고합니다.
야마토의 첫 여왕의 이름은 '히미코'입니다.
히미코 이후엔 '토요'란 여왕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여왕이 있었을테지만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라는 하나의 인물로 통합되어 있어서 안타깝게도
서기 2세기 후반~서기 3세기 후반의 히미코. 서기 3세기 후반의 토요 까지만 여왕의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있고
서기 3세기 후반부터 서기 4세기 후반까지 있던 야마토의 여왕들은 아직은 '신공황후'라는 하나의 인물 속에
모조리 먹혀있습니다.
서기 3세기 중~후반 야마토 여왕들은 중국의 식민지 대방군을 통해 대륙으로부터 들여온 선진 문물은
칼같은 무기류나 투구 갑옷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복잡한 무늬가 새겨진 아주 우수한 '청동 거울'을
수입해왔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야마토 정권의 고분들에선 위나라 대형 청동거울 수백개가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기 4세기 후반부터는 거울의 부장이 현저히 줄어들거나 사라지고 투구,갑옷,무기 그리고 승마에 필요한
마구 세트,농기구가 많이 부장되고
서기 5세기 초반으로 접어들면 무덤의 규모도 전보다 더 거대해집니다.
그리고 토우 '하니와(Haniwa)'가 많이 부장되는데. 이 하니와들의 절반은 무녀. 나머지 절반은 용맹한 무사(武士)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서기 4세기 후반부터 야마토는 무사와 무녀들이 한 명의 남자 왕을 받드는 체제로 바뀌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야마토는 철을 뽑아내거나 철을 녹여서 갑옷이나 무기는 커녕 농기구를 만들줄 몰랐는데요.
그런 그들이 어떻게 강력한 군사 문명으로 발전할 수 있던걸까요?
그 해답은 '칠지도'에 있습니다.
서기 369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보냅니다.
그 칠지도에는 왜왕의 이름은 '지'라고 적혀있고, 왜왕은 백제의 제후라고 적혀 있습니다.
왜왕이 백제의 제후다? 일본인들로선 충격적인 내용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 조선 선비 '강항'의 [간양록]을 보겠습니다.
강항은 2차 임진왜란인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많은걸 보고 들었는데요.
그 간양록에는 일본 천황의 시조가 '담로'란 이름의 섬에 내려왔다는 아주 충격적인 정보를 적고 있습니다.
'담로'..!
담로가 무엇일까요?
고대 중국 기록에 따르면 백제 왕의 성씨는 부여씨입니다. 짧게는 '여'씨라고 부르죠.
백제 왕 부여씨는 자기 나라의 군현들을 '담로'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담로에는 백제 왕이 자신의 왕족들을 제후로 파견해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 부여씨가 일본에 식민지를 만들었다는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일본열도는 백제의 식민지였고 그 식민지는 야마토이며 야마토의 왕은 바로 백제 근초고왕의 아들입니다.
칠지도에 다 나옵니다.
일본열도를 지배하는 백제의 식민지 '야마토'.
그리고 그 야마토는 백제에게 있어선 귀(貴)한 나라. 근데 그 귀한 나라의 왕에게 진사가 무례해서
왜왕이 진사의 조카 아신을 백제 왕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왜군을 보내서 진사를 죽였다....
그런데 이걸 광개토는 "백잔,ㅁㅁ,신라가 왜국에게 격파 당해 신민(臣民)이 되었다."라고 보고, 이걸 대대적 남침의 명분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분이 광개토비에 적혀있는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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