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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동천왕이 도읍을 낙랑군 총독부로 천도하다...

 고구려 동천왕이 중국 식민지 낙랑군의 총독부를 고구려의 새 도읍으로 선포 // 고구려 동천왕 시대의 역사적 변화와 중요 사건들 고구려 도읍의 이전 시대적 배경: 서기 247년, 고구려 동천왕 재위 21년에 도달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가 중요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도읍 이전: 동천왕은 환도성이 전란을 겪은 후, 더 이상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평양은 선인 왕검의 땅으로, 이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마한과 진한 부락의 정치적 동향 서기 246년의 '기리영 회맹' 사건: 마한과 진한 부락의 대족장들이 황해도 대방군의 기리영에서 모여, 낙랑태수와 대방태수에게 불평등한 무역과 직무 유기 문제를 제기하며 회맹을 열었습니다. 대방군의 창설: 서기 3세기 초반 공손강은 낙랑군의 일부를 떼어내 대방군을 창설하였습니다. 공손씨의 대방군은 마한 족장들을 읍의 군장으로 만들어 한나라 천자를 기만하는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위나라와의 관계 변화 위나라의 개입: 서기 238년 명제 황제는 사마중달을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보병 기병 4만을 보내 요동반도의 공손씨 정권을 정벌하면서 한편으론 낙랑태수와 대방태수를 임명하여 해군으로 몰래 바다를 건너게하여 낙랑군,대방군을 무혈 입성으로 접수했습니다. 위나라는 대방군에 사는 마한의 군장들에게 중국의 우수한 관모,관복,도장 등 굿즈들을 휙 휙 휙 뿌려서 공손씨가 아니라 위나라를 따르게 했습니다. 소제 황제의 전략: 소제 황제는 대방군을 약화시키고 낙랑군을 강화하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한과 진한 족장들의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독립 선언과 후속 사건들 독립 선언: 기리영에서 마한의 신분고국 신지가 대방태수를 참살하고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는 마한과 진한 부락들이 더 이상 위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낙랑군과 대방군이 합심하여 한국 반란군을 멸하였다고 기록...

김치의 기원과 역사적 배경

 김치의 기원과 역사적 배경 김치는 오랜 역사를 지닌 발효 식품으로, 그 기원은 고대 중국 산동반도에 거주했던 동이족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동이족(東夷族)은 기원전 5000년부터 기원전 3000년 사이 신석기 시대의 '다원커우' 문화, 기원전 2500년경의 '룽산 문화', 그리고 기원전 2000년경의 '악석' 문화(岳石文化, Yueshi culture)의 후손으로, 중국 최초의 왕조인 상(商) 나라의 왕족과 문화적, 혈통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대 문헌에서의 김치 기록 『시경』: 김치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 중 하나로, "밭두둑에 외(萵苣, 일종의 채소)가 열렸다. 외를 깎아 저(菹, 발효된 채소)를 담그자"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씨춘추』: 공자(은나라 후손)가 저를 먹으며 콧등을 찌푸렸다는 기록이 전해져 오며, 김치의 역사적 중요성을 더합니다. 『석명』: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키면 젖산이 생성되고, 이 젖산이 채소가 짓무르는 것을 방지한다고 설명하여, 저의 발효 과정과 중요성을 밝힙니다. 『주례』: 한나라 시대의 기록으로, 순무, 순채, 아욱, 미나리, 죽순 등 일곱 가지 저를 만들고 관리하는 관청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김치의 다양성과 발전 고대 중국 산동반도의 요리서인 『제민요술』에는 쌀가루로 담그는 김치를 포함하여 다양한 종류의 김치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는 김치가 다양한 재료와 방법으로 발효되어 왔음을 보여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다양성과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결론 김치는 단순한 식품을 넘어서, 오랜 역사와 깊은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시작된 김치의 역사는 다양한 문화와 시대를 거치며 발전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발효 식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대 문헌에 기록된 김치의 제조 방법과 그 의미는, 김치가 갖는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광개토비 신묘년 기사에 대한 명쾌한 설명

광개토비 신묘년 기사에 대한 명쾌한 설명 서기 391년에 나이 18살에 왕이 된 고구려의 소년 왕, 그의 이름은 '안' 또는 '담덕'이라 불립니다. 죽은 뒤의 시호는 '광개토태왕'이다. 즉위한 후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기 392년 음력 겨울 11월. 그는 심각한 소식에 직면해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를 '백잔'. 즉 100개의 패배해버린 패잔 잔챙이들이라 불렀습니다. 고구려는 백제를 고구려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나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백제는 본래 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에 걸쳐 있던 '마한' 연맹체의 속국이었고 그 '마한'은 경상북도의 이웃 나라인 '진한' 연맹체와 함께 과거 중국의 식민지 낙랑,대방에 속한 나라였습니다. 중국의 식민지 낙랑,대방과 낙랑,대방의 중국계 호족들은 고구려 동천왕~미천왕 때에 고구려를 따르는 든든한 후원 세력이 되었습니다. 고구려 왕실은 낙랑,대방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백제,신라는 마땅히 자기들에게 소속되어야할 속국으로 간주했습니다. 백제,신라 그들의 의사와는 관련없이 고구려는 그렇게 간주하고 있던 겁니다. 백잔의 왕 '진사'는 결코 고구려에 굴복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사는 고구려보다도 나라 내부의 진씨(眞氏) 가문을 적폐 세력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확실하게 제압해서 백제 왕실에 복종시켜야 앞으로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진사의 정치적 라이벌 '아신'. '아신'은 진사의 조카인데. 본래 아신이 왕이 되어야 했지만 아신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진사가 왕이 되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편을 보면 아신왕이 태어날 때 매우 신비한 기적이 일어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신의 출생에 뭔가 숨기고 싶은 무언가 출생의 비밀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본다면 아신은 백제 왕실과 왜국 왕실 사이에 태어난 혼...

이씨조선은 국뽕도 중뽕도 일뽕도 아님.

이씨조선은 국뽕도 중뽕도 일뽕도 아님. 이씨조선은 군자의 나라이고 예의와 의관 법도가 중국에서 나왔으니 정통 중국을 천자국으로 모신다. 큰 나라를 섬기며 작은 나라나 잘 가꾸고 다스리는게 올바른 질서를 찾는 것이라 믿었다. 무슨 소인들마냥 큰 나라를 섬겨야 살아남으니까 끙..하며 그런게 아님. 그건 고려지. 조선이 아님. 조선 왕 숙종은 울릉도 개나 물어가라 하고 일본에 주려고 했다. 왜냐면 어차피 거주 금지 구역으로 만든 빈 땅인데. 그냥 일본에 주면 되는거 아님? 이럼. 근데 신하들이 그건 안된다하고 반대해서 흠... 하고 그렇게는 하지않고 일본에 편지를 이렇게 써서 보냄. "동해 바다에 조선 땅 울릉도와 일본 땅 죽도(=타케시마=울릉도)가 있습니다."  근데 이렇게 편지 보낸게 더 문제를 꼬이게 만들고, 결국 모든 사신을 알게 된 도쿠가와 쇼군은 대노하고 "야! 울릉도=죽도=타케시마 는 조선 땅이니까  건너가는 놈 있으면 죽여버린다!" 이러고 문제를 끝냄. 숙종의 외교를 봐도 알 수 있듯 조선은 국뽕도 일뽕도 중뽕도 아니다. 자존심보다는 명분과 이익을 고루 따지며 무엇이 나라를 위한 길인가를 따지며 외교한다. 그것이 '사대 교린'이다. 큰 나라는 당연히 섬겨야하며, 포악한 야만족을 상대론 꾸짖고, 이웃나라 상대로는 친하게 지낸다. 지금 한국처럼 일본을 라이벌로 여기고 으르릉대며 독도같은 쪼그마난 암초 일본이 먼저 먹은게 맞는데도  무조건 우기려 들고 으르르르릉 아르르릉...거리다가 중국 북한이 야!하면 깨갱함. 존나 웃긴 외교 모양새임. 그러면 명분에서도 털리고 이익에서도 털리고 항상 미국 바지 가랑이 잡지않고서는 못 버티는거다. 일본이 먼저 먹은게 맞다면 주되, 그냥 주지는 말고 경찰 수비대 , 군대 다 치워버려. 그리고서 일본이 먹나 안 먹나 보는거야. 이런게 바로 성리학적 외교다. 일본 정부가 원하는건 독도가 아니다. 독도를 통해서 혐한 감정 일으켜서 일본인들을 단합시키고 다시 군대를 가진 나라로 만...

일본 무인시대가 고려 무인시대보다 더 빠름

 일본 무인시대가 고려 무인시대보다 더 빠름 일본 무인시대 타이라 키요모리 집권 시작 서기 1160년 고려 무인시대의 시작과 동시에 김돈중 뒤진거 서기 1170년 일본이 딱 10년 더 빠름 다만 타이라 키요모리는 막부를 세우지않음.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서기 1180년부터 1185년까지 헤이안 시대 말기에 벌어졌던 '겐페이 합전(源平合戰)'에서 이긴 후  천자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며 야만족을 정벌하는 장군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즉 막부의 쇼군 직위에 오름. 그 쇼군에 오르기 직전에 요리토모가 휘하 장군을 보내서 고려를 정벌하고 오게 함.  무인 막부를 세운건 고려가 먼저임.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고려로부터 배웠을 가능성이 있음. 아니 그 시대에 어떻게 배우냐고? 사료에 그런게 있어? 없지만 사료는 그런걸 일일히 적지않음.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와 임나일본부의 실체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와 임나일본부의 실체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는 어디까지? 칠지도 보낸 얘기도 일본서기에만 나오고 삼국사기엔 전혀 없다. 일본서기는 고구려 백제가 망한 서기 7세기 후반으로부터 세월이 좀 흐른 서기 8세기에 적혔고 삼국사기는 서기 12세기 고려시대에 적혔어. 그리고 통일신라 수구다라니경 그림에 당나라 스타일 복두 단령 입은 신라 신하 옆에 '질지'라는 삼한 전통 관직 이름이 적혀있는데. 일본서기에도 '질지'라는 관직이 나온다. 근데 삼국사기에는 '질지'라는 단어가 안 나와. 일본서기가 사료적 가치 높아. 대신 100% 다 맞는건 아니고 어느정도는 사실에 부합해. 그러니까 삼국사기랑 비교하며 봐야한다. //임나일본부는 식민지인가? 아니다. '막부'의 개념으로 봐야한다.  난 임나일본부를 식민지가 아니라 왜왕이 중국 천자를 대신해 한반도 남부에 막부를 차린거라고 보며 그 왜왕은 부여씨다. 왜인은 그저 왜노倭奴고. //임나일본부가 마...막부? 임나일본부의 일본서기 훈독 발음이 '미마나 야마토 미코토 모찌'다. 여기서 미코토가 천황 즉 천자이고. 미마나 야마토... 그러니까 읽기에 따라서 야마토의 천자가 미마나에 모찌 즉 자신의 대리인을 보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일본서기가 서기 8세기에 일본이 황제국 선포하고 편찬한거라는 점에서 감안할 때 그전에 왜왕은 황제를 칭하지않고 그저 대왕이었고, 서기 5세기 초반~후반의 왜왕은 중국에 조공 바치고 중국을 대신해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마한을 다스리는 총사령관이자 안동장군으로 책봉받은걸 보면 서기 5세기 초반~후반의 왜왕은 천자를 대신해 막부 쇼군이 되어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고 보면된다 그리고 그 왜왕의 정체가 사실은 부여씨이고. 막부幕府는 딱히 어떤 특정한 관청이나 성이 필요하지않고 그냥 장군이 머무르는 곳이 막부이다. 막부의 막幕은 군대 막사란 뜻이다. 천자의 대리인인 장군이 텐트 치면 그냥 그 곳이 막부다. 가마쿠라 막부...

로마의 나라, 왕씨의 나라, 바람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로마의 나라, 왕씨의 나라, 바람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 신라와 고조선의 관계 , 흉노와 고조선의 관계?에 대한 잡설 삼국지 동이전 진한편 보면 진한 12국은 위만조선 중심지인 낙랑을 떠난 중국 춘추전국 시대 사람들로 나옴. 고조선 피가 섞이긴 섞였겠고 관련은 있기는 있겠지만 확실한건 100% 오리지널 조선인은 아님. 왜냐면 걔들 연나라 제나라 노나라 진나라 말 쓴다는게 삼국지 동이전,삼국유사 둘 다에 그리 적혀있음. 그리고 고조선이 흉노랑 친한게아니고 위만조선이 흉노의 왼팔 짓 한거고. 위만조선 이후 낙랑군의 고고학 문화 보면 확실히 흉노스런 문화 유물들이 나오기는함. 무슨 용같은 사슴이 하늘을 향해 고개 치켜들고있는 무슨 큼지막한 거라든가 서역의 흉노 계통 족장이 한나라 황제한테 선물받은 금동용문거대장식이 낙랑에서도 나옴. 그래서 위만조선에 흉노 계통 세력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음. 그리고 어쩌면 걔들이 경주로 내려갔을지도 모름. 그리고 한나라 시즌1인 서한西漢(=전한前漢)과 한나라 시즌2인 동한東漢(後漢) 사이에 왕망의 '신(新)'이란 나라가 끼어있음. 왕망의 '신(新)'은 유대 왕 헤롯과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하던 시절에 있던 중국의 왕조인데 왕망이랑 친한 호족이 김(金)씨 호족인데 이 김씨 호족 조상이 한무제의 신하인 투후 김일제로  흉노의 왕자인데. 말 잘 기르는데다 외모도 잘생겨서 한무제의 총애를 받음.  한무제가 암살 위기 겪을 때 김일제가 몸을 던져 막아 구해서 한무제는 더더욱 김일제를 총애했고  김일제에게 산동반도의 금성(金城)이란 곳을 식읍으로 하사함. 한무제가 살던 시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대략 100년전의 시절임. 대충 이렇게 하면 감이 오지? 왕망이 화폐 개혁 하다가 경제 좆망시키고, 흉노한테 시비 걸다가 국방 망쳐버리고, 고구려 왕 '추'의 목을 잘라서 지 수도 장안으로 쿠팡택배 시키는 바람에 부여,고구려를 쌍으로 적으로 돌려버림. 꼬이고 꼬여서 결국 왕망의 신新은 산동반도에서...

그 삼국지 촉나라 익주 10만이 다 병사겠냐

그 삼국지 촉나라 익주 10만이 다 병사겠냐  병사,보조파트너(=보인保人),살림살이파트너(얘도 보인保人. 봉족奉足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음)지. 거란도 병사(=기병)1,타초곡기 1,수영포가정 1,짐 들고 요리하는 노예 여러 명 이렇게 구성됨. 사서에서 병사 10만이니 병사 8만이니 6만이니 40만이니 하면 절대로 그걸 다 전투병이라고 보면 안됨.

근초고 당시 진씨(眞氏) 가문의 정체

 근초고 당시 진씨(眞氏) 가문의 정체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편을 보면 근초고왕 초기 20년은 거의 사실상 진(眞)씨 가문이 다스린 거로 나오고 근초고 통치 기록은 대략 20년 정도 공백으로 되어 있다. 진씨 가문...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후대 기록이라는걸 감안할 시,  과연 근초고 초기에 '진씨 가문'이 '진씨 가문'이라 불렸을까? 근초고 통치의 후반기는 서기 4세기 후반. 근초고가 즉위한건 서기 4세기 중반인 서기 346년이다. '백제(百濟)'란 나라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건 서기 372년 난징 정권의 황제 '사마욱'에게 조공바치는 때부터다. 그전엔 백제가 중국에 조공을 바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즉 기원전 18년 백제 1대 족장 온조 때부터 서기 346년 백제의 족장 '계'가 죽을 때까지(1.온조, 2.다루, 3.기루, 4.개루 ,5.초고 ,6.구수, 7.사반, 8.고이,9.책계 ,10.분서 ,11.비류 ,12.계 이 자들이 실제로 실존했다고 100번 양보해서...)  심지어 백제의 13대 왕인 '근초고'의 통치 후반기인 서기 372년에 이르기까지 백제는 중국에 조공을 할 정도의 추진력은 커녕 힘도 없었다는 말이 될 수 있다. 혹자는 그냥 조공을 안 바친게 아닐까? 라고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서기 3세기 후반에 적힌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백제는 한자로 百濟가 아니라 伯濟라고 나온다. 이는 매우 큰 차이다. 百濟는 100+제濟이다. 엄청나게 많은 이주민들이 바다나 강을 건너와 연합해서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伯+濟라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맏 형님 되는 부족이 친히 강이나 바다를 건너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1대 왕 온조의 기록인 '온조 본기'에 따르면, 온조가 나라를 세우던 초반에는 10명의 신하들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나라를 세워서 十濟라 ...

손권이 공손연 보고 4군 관리 참 잘해요 하며 칭찬함. 그리고 병사를 무려 1만명이나 줌.

손권이 공손연 보고 4군 관리 참 잘해요 하며 칭찬함. 그리고 병사를 무려 1만명이나 줌. 공손씨가 당시 요동 현토 낙랑 대방 4군의 지배자였다는걸 감안하면 요동반도 답씨현이나 압록강 하구 서안평을 중심으로 4군 과 오나라 양자의 무역이 있었다는걸 알 수 있음. 공손연의 정권의 국무총리가 이름이 왕건王建임. 아마 낙랑 왕씨인거같음. 근데 공손연이 손권의 책봉 편지 보고서 흐뭇해하며 읽다가 (당시 조공과 책봉은 서로의 립서비스라서 그런걸로 기분 나뻐하는 찐따는 없음.) 막줄에서 부들부들거리면서 오나라 사신들 상대로 칼춤 무쌍 댄스를 춤. 도대체 왜? 그리고 공손연이 현토군의 감옥에 가둔 오나라 장군들이 무쌍 찍고 탈옥해서 고구려로 도망침. 왜 부여로 도망치지않고? 부여는 공손씨의 혼인 동맹 국가라서 안됨. 고구려 동천왕에게 겨우 겨우 도착한 오나라 장군들은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 왕을 책봉해준다는 편지를 척하고 전달함. 오나라측 기록에 따르면 이건 대충 둘러대고 사기친거야~ 라고 하지만 글쎄.... 공손연이 무쌍 댄스 춘건 오나라가 공손씨를 중간 매개자로 해서 고구려와 무역을 하려했고 고구려와 원수 관계였던 공손씨로선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거. 근데 고구려 동천왕은 공손씨를 기필코 조져 버릴려고 위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고있었음. 근데 위나라는 오나라를 싫어함.  고구려가 오나라랑 무역한다면 공손씨를 조져버릴려고하는 위나라랑 척을 지게 됨.  그럼 공손씨와 어찌 어찌 화해할 수는 있겠고  그러면 오나라-공손씨-부여-고구려 4자 동맹이 형성되면 위나라는 그야말로 개짜증나는 상황이 됨.  근데 이리 되면 선대 이이모 태왕(=산상왕)님의 원한을 벌써 잊어버렸냐면서 고구려 5부족 족장들이 전부 들고일어날 것임.  꼬이고 꼬인 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