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한사군 계승 의식 사료
왕건의 한사군 계승 의식 사료
======테마 음악===========
https://youtu.be/JIr33MzfKjQ?si=HwiTJKLsJAWNSJ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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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인(前主 : 궁예 ]는 4군(四郡)이 흙 무너지듯 무너지는 때를 맞아 도적의 무리를 제거하고 점점 영토를 넓혀갔다."(前主當四郡土崩之時, 剷除寇賊, 漸拓封疆. )
.... 이에 〈더하여〉 함부로 연호(年號)를 정하고 황제라 일컬었으며[稱尊] 처자를 살육하였으니,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하고 귀신과 사람이 함께 원한을 품어 왕업의 기반을 송두리째 추락시켰으니[荒墜厥緖]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랴? ( 於是, 竊號稱尊, 殺妻戮子, 天地不容,
, 神人共怨, 荒墜厥緖, 可不戒乎?
)_고려사 태조 세가의 왕건 즉위 조서
왕건은 후삼국 시대가 벌어지던 한반도를 '4군(郡)' 즉 한무제의 한漢 사군四郡으로 봄.
그리고 여기서의 도적은 민란군이라기보다는 호족으로 보는게 한국사학계의 정설.
왕건은 궁예가 연호를 정하고 황제라 일컫고 처자를 살육한걸 궁예의 죄악과 자신의 반역의 명분으로 주장함.
(결국 궁예가 연호를 정하고 황제라 일컫는 행동들이 궁예의 부인이자 큰 후원자였던 신천 강씨와 두 아들을 등 돌리게 한 듯함.
신천 강씨 부인의 호족 가문 신천 강씨는 중국에 조공 바치는 무역에서 큰 짭잘한 이익을 보던 듯한데. 그걸 못 하게하고 오히려 거란 중심 무역을 하니
개빡친듯하다. 궁예가 거란에 사신 보내 보검 선물한게 서기 915년인데. 신천 강씨가 궁예 보고 도리 거스르는 짓 그만하라고 심하게 따진 것도 서기 915년의
일이다. 이에 궁예가 반발하자 신천 강씨와 두 왕자가 반란을 일으킨 듯 하다.
근데 독자적 연호를 정하고 황제를 일컫는건 왕건도 하던거다. 그러나 왕건은 중국에 조공하고 책봉받았다. 이것이 궁예와는 다른 것이다.
궁예는 중국에 단 한번도 조공하지도않고 책봉을 구걸하는 사신도 보내지 않았다.
왕건이 황제를 칭한건 지방 정권들인 호족들 위에 군림하기위한 정치적 목적이었던듯 하고,
궁예가 황제를 칭하고 황제의 칭호로 미륵을 정한건 자주적인 나라를 지향한 것이었던듯 하다. )
"○ 장흥長興 3년(A.D.932; 高麗 太祖 15) 에 권지국사權知國事註 013 왕건王建이 사신을 보내오니,
[후당後唐] 명종明宗은 즉시 건建을 현토주도독玄菟州都督으로 제배除拜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충임充任하는 동시에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註 014
[王]건建은 고려高麗의 대족大族이다.註 015
○ 至長興三年(932)校勘 007 , 權知國事註 013王建遣使者來, 明宗乃拜建 玄菟州都督, 充大義軍使, 封高麗國王校勘 008註 014. 建, 高麗大族也.註 015" "
_신오대사(新五代史) > 사이부록(四夷附錄) > 고려(高麗)
후당 명종에게 왕건이 사신 보낼 때 왕건은 자신을 권지국사라 칭했다. 이는 임시로 선 왕이니 정식 임명을 해달라고 빌빌대는 뜻이 담긴 칭호다.
권지국사가 그런 뜻이다.
후당 명종은 왕건은 현토군 총독으로 제배(除拜) 즉 중국의 관직을 임명하고 대의로서 군을 일으키는 자에 임명하고
추가로 겸하여 왕건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하였다. 책봉. 이것은 왕건이 한반도를 다스려도 좋다고 중국이 땅을 떼어주어 하사하는 것이고
왕건은 이걸 좋다고 냠냠 핧아먹은 것이다.
이걸 형식적 외교에 불과하다고 현대 한국적 관점에서 옹호해주면 안된다.
우리가 굳이 이렇게 빌빌댈 필요도 없는데. 빌빌댄 거다. 애초에 우리가 아니고, 왕건이 중국을 좋아하는 호족들의 지지를 얻기위해서, 그리고 왕건 자신도
중국을 좋아하기 때문에 중국이 인정해주는 권위를 국제적 권위라 생각하며 빌빌댄거 같다.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의 속민인 고구려를 현토군의 고구려현에 묶었던 옛 역사에 대해 경각심 가지지는 않고 오히려 현토군의 총독으로
임명해달라고 빌빌대니 고려가 어떻게 우리 자랑스러운 나라이며 옛 고려(고씨 고려=고구려)의 진정한 계승자일까?
왕건은 지 주인을 내쫓고 자기를 옹립시켜준 환선길을 정원으로 유인해 자객들을 시켜 죽인 추악한 반역자다.
왕건이의 무덤을 파내서 그 뼈를 부수는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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