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조상 낙랑 왕씨 장회무족의 역사!!!
왕건의 조상의 역사
왕건의 왕씨는 낙랑 왕씨다. 낙랑 왕씨는 기원전 177년 제북왕 유흥거의 난 때 산동반도를 떠난 왕씨 가문이 위만조선의 수도인 낙랑 땅에 정착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했을 때는 한나라의 통치에 적극 협력해 낙랑의 주요 호족으로 성장한다. 기원전 50년 쯤부터는 중국 산동반도의 영향을 받아 귀틀무덤이라는 새로운 묘제를 사용하며 화려한 부장품들을 묻는다. 서기 23년 왕씨로 창씨개명했던 고조선 원주민 왕조(王調)가 낙랑태수 유헌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중국계 낙랑 왕씨는 왕조에게 협력하다가
7년만에 요동에서 토벌군이 오자 왕조를 죽이고 목을 잘라 요동태수 왕준에게 척하고 갖다바친다. 그 후에도 중국계 낙랑 왕씨는 다시 낙랑 땅의 주요 호족의 위치를 계속 유지한다.
그들은 중국 황제의 한반도 통치를 도와 중국 황제가 진정한 임금으로 천하에 우뚝 설 수 있게 해주는 적극적인 협력자들이다.
작제건作帝建 .... 임금을 만들고 세우는 자 ..... 그 자체다!
그들은 장사꾼들이고 음험한 모략가들이며 암살에 능수능란하다.
서기 313년 고구려 왕 을불리(미천왕)가 낙랑,대방을 먹자 낙랑,대방의 왕씨 호족은 반은 고구려에게 협력하는가하면 다른 반은
만주 서쪽 요서 땅의 모용선비에게로 도망친다.
모용선비 대선우 모용외는 요서에 낙랑군,대방군을 새로 만들고 왕(王)씨,장(張)씨(얘들도 낙랑대방계 중국 호족이다.)를 요서의 낙랑,대방 군현 관리자들로
임명한다.
광개토,장수왕,타브가치 선비족(=훈육=북위)에게 격파당해 멸망한 모용선비... 주인 모용선비를 잃은 개새끼들인 낙랑 대방 왕씨들,장씨들은 울며
북위에게 투항하거나 배 타고 백제로 간다.
이들은 북위나 백제에서 주요 요직에 임명되고 거기서 다시 힘을 모은다.
서기 930년 견훤의 후백제와의 고창(지금의 안동)전투에서 승리하여 크게 사기가 오른 고려는
고창 지역 등 신라 호족들의 지지를 더욱 더 끌어모으기 위해서인지(내 생각이다) 서기 932년(태조15) 중국 후당(後唐:923~936년)에 사신을 보낸다.
후당 황제 명종은 이듬해 3월 사신 왕경(王瓊)과 양소업(楊昭業)을 보내,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는 조서를 보낸다.
『고려사』에는 왕건 및 처 유씨(柳氏)의 책봉조서, 책봉과 함께 물품을 보낸다는 조서, 3군의 군사에게 국왕 책봉을 알리는 조서 등 모두 4통의 조서가 실려
있어(고려사 권2 태조 16년(933) 3월조 참고), 그런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후당 황제 명종이 왕건의 아내 유씨(柳氏)를 책봉하는 조서에는.
“그대(*왕건)는 장회(長淮)의 무족(茂族:번성한 명문의 족속)이며 창해(漲海)의 웅번(雄蕃)이다.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영토를 보유하고 충효의 절개로 중국의 교화와 풍속을 받았다.”(又詔曰 卿 長淮茂族 漲海雄蕃 以文武之才 控玆土宇 以忠孝之節 來化風)란 구절이 있다.
중국 학자에 따르면, 장회(長淮)의 ‘장’은 길다는 뜻의 수식어이며, ‘회’는 중국의 회하(淮河), 혹은 회하 유역이다.
‘창해의 웅번’은 바다 건너 커다란 번국의 제후라는 뜻이다.
왕건의 왕씨가 중국 대륙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다.
송나라가 고려 성종을 책봉한 985년(성종4) 조서에는 “항상 백제(百濟)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장회 출신인 너의 족속을 영원히 번창케 하라”(常安百濟之民, 永茂長淮之族;『고려사』권3·성종 4년(985) 5월조)라고 나온다.
여기서의 백제 백성은 전라도의 후백제인들만이 아니라, 중국 난징 등 중국 동해안가에 분포해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방'들(아마도 다수의 백제 유민들과 소수의 신라인들이 경주 정권과 연계해서 무역을 하여 중국과 한반도의 가교가 되어주는 중국의 코리안 타운들 같은데. 질 좋은 도자기를 제작하는 공인들이 우글 우글
많지 않았을까?) 에 분포해있는 백제인들이 아닐런지?
후백제가 북부 중국인 '후당'이 아니라 난징의 오월로부터 책봉을 받은건 오월의 중심지인 난징에 백제 유민들이 밀집해있지않았을까?
아니 부여씨 백제 멸망 그 이전부터 백제인들이 난징에 우글 우글 했을수도 있다. 아니 그보다도 더 먼저 서기 3세기 후반 삼국지 시대 말기에
마한의 신미제국新彌諸國 즉 '침미다례(침미의 많은 나라들)' 수십개 나라들의 백성들(아마 해적)이 중국 오나라 해안가에 마구 마구 상륙해서 사마씨 진나라에 귀부,,귀화 ,내부 하고 이로 인해 오나라가 갑자기 덜커덕 멸망했던 때부터 출발할 수도 있다.
서기 4세기 후반 근초고 시기부터 부여씨 백제의 도자기는 난징 사마씨 정권의 도자기와 제품이 똑같다.
난징 사마씨 정권의 해변에서 도자기를 제작하는 마한계 공인들이 완성품을 부여씨 백제에 수출한 것일 수도 있다.
아마 도자기 제작에 좋은 특수한 재료가 난징에 있던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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