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풍후의 고려장의 기원 온돌의 기원 연구
책사풍후의 고려장의 기원 온돌의 기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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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연행록에 나오는 고려장
세종 44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4월 4일(기묘) 3번째기사 구습의 오점을 고치고 인효의 풍속을 이루게 하라고
예조에 교지를 내리다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사람의 자식으로 부모가 살았을 때는 효성을 다하고, 죽어서는 슬픔을 다하는 것은 천성(天性)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고,
직분(職分)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것이다.
「고려 말기에 외방(外方)의 무지(無知)한 백성들이 부모가 죽으면 도리어 간사한 마음으로 즉시 그 집을 무너뜨리고,
또 부모가 거의 죽어갈 때에, 숨이 아직 끓어지기도 전에 외사(外舍)로 내어 두게 되니」
비록 다시 살아날 이치가 있더라도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14책 44권 2장 A면 【영인본】 3책 174면 【분류】 *풍속-예속(禮俗) / *풍속-풍속(風俗) / *윤리(倫理) / *역사-전사(前史) 조선왕조실록
(중국 삼국지 시대 위나라의 고분 벽화의 고려장처럼 보이는 모습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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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 관련 우리나라 연행록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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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日記) / 계사년(1713, 숙종 39)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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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옥하관에 체류하였다.
호인 장사치의 왕래가 날로 많아져 시끄럽고 북적북적하니 매우 괴로웠다. 《관안(官案)》을 얻어 보니, 영고탑(寧古塔)에 도통 장군(都統將軍)과 부도통(副都統) 2인이 있었고, 성경(盛京)ㆍ흑룡강(黑龍江) 등 지방에도 도ㆍ부통 3인이 있어 병권(兵權)을 전관(專管)하는 것이었다. 도원수(都元帥)가 1품이고 각로(閣老)는 정2품인데, 원래의 수는 6인이었다 한다. 그런데 현재는 5인으로 온달(溫達)이 수석(首席)이다. 품계(品階)는 좌석(坐席)을 표로 하여 1품 좌석은 끝이 검고 바탕은 붉으며, 2품 좌석은 1품 것과 서로 반대이고, 3품 좌석은 전부 홍색(紅色)이다. 또 3품 이상은 등자(鐙子) 위에 자수정(紫水晶)을 꽂고, 1품이면 진주를 더 박으며, 3품에서 6품 이상까지는 청수정(靑水晶), 9품 이상은 백수정을 박는다 한다. 겨울철에는, 1품은 토종의 호피(虎皮) 좌석에 앉고, 2품은 낭피(狼皮), 3품 이하는 잡피(雜皮) 좌석에 앉는다고 한다. 또 들으니 이상한 재주가 있거나 술업(術業)을 아는 사람은 임금이 반드시 의심하므로 모두 자취를 감춰서 이름이 드러난 자가 없다 한다. 또 만족(滿族)이나 한족(漢族)으로서 공경(公卿)은 거의 화장하지 않고 광중(壙中)에 온돌을 만들며 옆에 통래(通來)하는 구멍을 뚫어서 수직하는 사람이 드나들며 촛불을 켠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옛날 고려장(高麗葬)과 같은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익성 (역) | 1976
여기 나오는 고려장은 구덩이를 파고 온돌을 깔고 통하는 통로를 열어두어서 노인을 거기 놔둬서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게하고 수직하는 사람이 교대로 왕래하며 촛불을 켜는걸 말함.
물론 음식도 놔두는 것이므로 보통 아는 고려장과는 좀 다름.
요양원이나 정신병원이나 입원실이 있는 병원이 딱히 없던 고대 중세 근세 시대의 동양은 치매 ,노망 , 정신병같은 각종 재앙적 사태에
대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조도 땅 속 깊숙이 판 벽돌방무덤에 묻혔고
난징 정권인 양나라의 영동대장군으로 책봉된 사마 왕(백제 무령왕)도 벽돌방무덤에 묻혔고
패서 호족인 낙랑 대방의 한漢족 계통 호족들도 삼국지 시대,남북조 시대에 벽돌방 무덤에 묻혔다.
죽지않았는데 그냥 벌써 거기에 유폐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
조조가 화타 죽이고 순욱한테 콩알만한 독약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빈 상자 보내고 그런건
관우의 잘린 머리를 쿠팡 택배로 받은 후부터 일어난 일인데.
조조가 머리 막 아프다 한 것도 아니고 조조 말년에 돌아버린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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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 기술을 한민족이 만든 이유에 대한 내 생각
고대 중국 한나라의 하북성,산동반도,하남성에서 돌방 무덤이 요동 현토 낙랑 대방의 중국 군현들의 호족들에게
전파됨
고대 중국에선 노인이 노망이나 치매나 정신병 들면 사망 판정 내리고 그 안에 유폐시킴
그러면 추워 죽음
그러나 조선 피가 섞인 요동 현토 낙랑 대방의 '군자 다이묘' 즉 호족들은 온돌 기술을 발명해 최초의 고려장을 시작했고
이 풍습은 돌방 무덤 양식과 함께 고구려,백제,일본으로 전파됨
'군자 다이묘'는 거의 왕급의 권위를 행사하는 자들로 자신들만의 농장들을 보유하고
군사를 갖추고 중앙 정권과의 유대 관계를 맺어 각지의 지방 정권들이 되었는데
이들의 등장은 중국 삼국지 시대였고
이미 그런 존재들은 기원전 50년 쯤 북한 낙랑에서 왕씨 호족으로 등장했다.
사마씨 진나라는 군자 다이묘 사마씨가 세운 나라였다. 그러나 군자 다이묘들의 권력을 통제치 않고
왕실의 내분으로 인해 자신들이 그동안 용병으로 사용해오던 북방 기마민족들의 침략으로 멸망한다
군자 다이묘들은 북방기마민족들이 세운 유사 중국의 신하가 되거나
난징으로 도피한 사마씨에게 가거나
고구려가 간접 지배 중인 요동 현토 낙랑 대방으로 가서 고구려의 신흥 귀족 세력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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